🌊 시간이 느리게 흐르던 곳, 외연도에서의 여름
도시의 여름은 숨이 막힐 만큼 뜨겁고 분주했다. 한강 바람으로도 식히기 어려운 더위 속에서, 우리는 도망치듯 여행을 계획했다. 어디론가 멀리, 사람들이 많지 않고, 바다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 그렇게 선택한 곳이 바로 외연도였다.
외연도는 충청남도 보령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는 작은 섬이다. 인터넷 검색으로도 정보가 그리 많지 않았고,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자극했다. “이왕이면 진짜 섬 같아야지.” 친구 중 하나가 말했고, 우리는 망설임 없이 예약을 눌렀다. 그렇게 7월의 어느 아침, 간단한 짐과 기대감을 가득 안고, 우리는 섬으로 향했다.
🚢 바다 위의 이동, 일상에서의 멀어짐
보령에서 외연도로 가는 배는 하루에 한두 번밖에 없었다. 승선 시간은 오전 10시. 우리는 아침 일찍 출발해 항구에 도착했다. 선착장엔 짐을 가득 실은 마을 사람들과, 우리처럼 낯선 표정을 한 몇몇 여행자들이 있었다.
배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육지는 점점 멀어졌고, 바다의 색은 조금씩 짙어졌다. 파도 소리와 함께 불어오는 바람, 뱃머리에서 튀는 물방울들, 그리고 그 속에서 소리를 높여 웃는 친구들의 모습.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웃음들이, 바다 위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났다.
2시간쯤 흘렀을까. 저 멀리 작은 섬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언덕과 나무들, 그리고 고요히 떠 있는 낚싯배 하나. 외연도는 그렇게 우리 앞에 나타났다. 고요하지만 단단한 느낌. 말수 적은 어르신처럼, 깊이를 품은 풍경이었다.
🏡 섬 마을에서의 첫날
섬에 도착하자 가장 먼저 느낀 건 시간의 느림이었다. 자동차 대신 자전거나 도보로 이동하는 사람들, 이따금 지나가는 트럭 한 대, 그리고 인사를 건네는 마을 주민들의 정겨운 말씨. 우리는 민박집에 짐을 풀고, 곧장 바닷가로 향했다.
외연도의 해변은 작고 조용했다. 모래사장 대신 자잘한 조약돌이 발에 닿았고, 물빛은 맑고 투명했다. 신발을 벗고 바다에 발을 담근 순간, 한여름의 열기가 한순간에 식어내렸다. 친구 하나가 물장구를 치며 장난을 걸었고, 그 순간 모두가 아이처럼 웃었다. 10대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고, 바다를 마주하며 웃기만 해도 되는 그런 시간.
저녁은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가 만들어주신 식사로 해결했다. 갓 잡은 생선구이, 된장국, 오징어 무침, 김치까지—한 상 가득 차려진 밥상은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 이상의 감동을 주었다. 우리는 배불리 먹고, 마당에서 깔린 돗자리에 앉아 캔맥주를 나눴다. 그리고 이야기했다. 예전 이야기, 미래 이야기, 지금의 이야기. 별은 조용히 뜨고, 바람은 말없이 불었다.
🐚 외연도의 아침과 바다 너머의 이야기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일찍 일어나 해안 산책로를 걸었다. 외연도에는 등대와 전망대가 있었고, 그 길로 가는 도중 수풀 사이로 보이는 바다는 매 순간 다른 색을 띠고 있었다. 가끔 멈춰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결국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사진이 아닌 눈으로 담은 풍경이었다.
전망대에 올라 바다를 바라봤다. 시야에 들어온 건 수평선 하나, 그리고 그 위를 천천히 지나가는 배 한 척. 친구는 조용히 말했다.
“이런 데서 한 달쯤 살면, 사람 참 좋아질 것 같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쟁과 속도가 당연한 세상에서, 이렇게 느리게 흐르는 시간은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힘이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갯벌 체험장에 들렀다. 민박집 주인께서 삽과 바구니를 빌려주셨고, 우리는 조개를 캐며 한껏 신이 났다. 진흙투성이가 된 친구를 보며 모두가 배꼽 잡고 웃었고, 그 모습은 평생 기억에 남을 여름의 한 장면이 되었다.
🌅 떠나는 날의 노을, 그리고 약속
마지막 날 오후, 우리는 선착장에서 다시 배를 기다렸다. 짐은 많지 않았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득했다. 배가 출발하기 직전, 저 멀리 섬 뒤편에서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핑크빛과 주황빛이 뒤섞인 하늘 아래, 외연도는 마치 안녕을 말하듯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친구 중 하나가 말했다.
“우리, 내년에도 꼭 다시 오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장소는 한 번 다녀오는 것으로 끝나지만, 외연도는 그렇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고 싶은 마음, 다시 웃고 싶은 기억, 다시 느끼고 싶은 공기가 있는 곳이었다.
✍️ 우리 안에 남은 여름, 외연도
도시로 돌아온 후에도, 외연도의 풍경은 자주 떠오른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창밖을 멍하니 보다 보면 그 바다 냄새가 문득 그리워진다.
그 여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나눴다. 시끌벅적하지 않았지만, 매 순간이 선명했다. 누군가와 함께 한 섬 여행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더 깊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여행 그 이상이었다.
외연도는 우리에게 하나의 계절이었다.
우정이 반짝였고, 웃음이 바람에 실렸으며, 추억이 고요한 파도처럼 마음에 일렁였다. 그 여름의 우리는, 섬이라는 시간 속에서 조금 더 단단해지고,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나는 안다.
앞으로의 삶이 아무리 바쁘고 복잡해도, 그 여름을 기억하는 순간마다 마음 한켠에 다시 바람이 불 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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