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이 흐르는 도시, 캠브리지에서 보낸 하루
지성이 살아 숨 쉬는 도시, 캠브리지에서의 하루
미국 동부 여행의 여정을 계획할 때, 나는 캠브리지(Cambridge)라는 도시에 큰 기대를 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캠브리지는 단순히 하버드대학교와 MIT가 있는 학문의 도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이 도시는 단지 지식의 상징을 넘어서, 한 사람의 여행자로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으로 다가왔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바로 그 캠브리지에서 하루를 보내며 삶의 또 다른 가능성과 만났다.
하버드 스퀘어에서 시작된 아침
캠브리지를 향하는 지하철 레드라인 열차를 타고 도심을 벗어나 하버드 스퀘어에 도착했다. 역에서 나와 처음 마주한 풍경은 붉은 벽돌 건물들과 고풍스러운 거리, 그리고 그 사이를 조용히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뉴욕이나 보스턴의 번잡함과는 확연히 다른, 고요하고 정제된 분위기였다.
존 하버드 동상 앞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하버드대학교의 상징이라 불리는 이 동상은, 세 가지 거짓말로도 유명하다. 나는 관광객들을 피해 조용히 캠퍼스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이곳은 그야말로 지성이 일상처럼 스며 있는 공간이었다. 잔디밭에 앉아 책을 읽는 학생들, 고풍스러운 도서관 앞을 지나가는 교수들, 그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첼로 소리까지—모든 것이 한 편의 그림 같았다.
학교 안의 와이드너 도서관(Widener Library) 근처를 걷다 보면, 수십 년간 학문과 연구의 중심이 되어온 이 공간이 단순한 학술기관 그 이상임을 깨닫게 된다. 벽돌 하나하나에 깃든 시간의 무게, 그리고 지식이 축적되어온 공간의 밀도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었다.
하버드 북스토어와 지적인 문화
캠퍼스를 나와 마주한 곳은 바로 하버드 북스토어(Harvard Book Store)였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장소 중 하나다. 체인 서점과는 다른 독립 서점 특유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책 냄새와 나무 선반의 따뜻함이 나를 반겨주었다.
이곳의 추천 도서 코너는 무척 흥미로웠다. 직원들이 손글씨로 남긴 책 소개는 마치 친구가 추천해주는 느낌이 들었고, 중고책 섹션에서는 오래된 페이지 사이로 낙서와 메모들이 숨어 있었다. 그 흔적들은 이전 독자들의 삶과 생각을 엿보는 작은 창처럼 느껴졌다.
서점 근처의 작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나는 들고 있던 여행 노트를 꺼내 하루의 감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쓰거나, 책을 읽거나,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하고 있었다. 이 도시는 사유의 공간을 허락하는 도시였다.
MIT 캠퍼스와 찰스 강의 오후
점심 이후에는 찰스 강(Charles River)을 건너 MIT(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로 향했다. 캠브리지와 보스턴 사이를 흐르는 이 강은 단순한 지리적 경계를 넘어, 캠브리지의 또 다른 정체성을 상징한다. 강변을 따라 늘어선 산책로를 걷는 동안, 나는 조깅을 하는 시민들,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 강가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마주쳤다. 바쁜 도시 속에서도 여유가 살아있는 풍경이었다.
MIT 캠퍼스는 하버드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더 현대적이고 실용적인 느낌, 그리고 어디선가 전자 기기의 냄새가 날 것 같은 분위기랄까. 특히 Stata Center는 마치 비정형 건축의 전시장 같았다. 삐뚤빼뚤한 창문과 기울어진 벽면은 이곳이 단지 건물이 아니라 창의성과 자유로운 사고의 상징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학생들의 모습도 흥미로웠다. 길을 걸으며 로봇 팔을 테스트하는 학생들, 건물 벽에 프로젝트 설명 포스터를 붙이는 모습, 교정 한편에서 전자 회로를 들여다보며 토론하는 장면—모두가 학문이 삶 그 자체가 되는 순간들이었다.
석양과 함께 돌아본 하루
강 건너 보스턴 쪽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캠브리지에서의 하루를 곱씹으며 걸었다. 해는 천천히 서쪽으로 지고 있었고, 찰스 강 물결은 노을빛으로 반짝였다. 하루 종일 걷고, 보고, 느끼며 쌓아온 생각들이 강물처럼 조용히 내 마음을 적셨다.
생각해보면, 캠브리지는 단지 명문대가 모여 있는 도시가 아니다. 이곳은 지성을 사랑하고, 사유를 일상으로 삼으며, 깊이 있는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도시다. 그들의 모습은 이방인인 나에게도 강한 영향을 주었고, 나 역시 무언가를 더 알고 싶고, 더 깊이 생각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여행을 넘어서, 삶의 방식으로
캠브리지에서의 하루는 나에게 단순한 관광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이 도시는 지적인 호기심을 자극했고, 동시에 내면의 고요함을 되찾게 해주었다. 바쁜 삶 속에서 때로는 멈춰 서서 생각하고, 사색하며,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언젠가 다시 이곳에 오게 된다면, 그땐 단지 여행자가 아닌,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좀 더 깊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리고 오늘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 안의 작은 캠브리지는 여전히 고요하게, 그러나 분명히 살아 있다.